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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토픽/토픽.스토리

6.25전쟁 발발 61주년-3일이 만든 역사, 휴전선...

by 라떼블루 2011. 6. 25.

6.25 북한군 최대 미스테리 서울 점령 후 3일
& 유엔군 9.28 서울수복 후 한국군 38선돌파 북진까지3일
  

북한군 3일 미스테리의 진상은?

6.25발발 61주년...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남침중인 북한 선봉부대

   

국군 7사단과 국군 5사단의 미아리방어선을 쉽게 돌파한 북한군은 28일 오전 서울시내를 행진까지 했다.
그런데 이때 북한군 6.25 최대의 미스테리가 시작된다.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이던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진격을 멈추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전열을 재정비할 기회를 주었다' 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왜 그들은 3일 간 공세를 멈추었을까?
지금도 이것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만약, 그 당시 북한군이 그대로 남진을 했다면 시간적으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과 유엔군 참전이 가능했을까?

■ 북한군 후발 주력 2, 12사단을 기다렸다. ■ 한강을 넘을 도하장비가 없었다. ■ 서울 장악만 하면 남한 전체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 무혈 통일을 이룰 것으로 예상했다. 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이로써 한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이 전쟁의 방어전략 개념을 '38선 고수'에서 '지연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9.28 서울 수복, 그리고 북진까지의 3일

9.15 인천상륙으로 9.28 서울은 완전 수복된다. 
그러나 상륙군부대 외에 낙동강방어선에서도 총 반격이 개시되었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일시에 붕괴되었고 전세는 완전 역전되었다.
그리고 서울수복과 함께 국군은 이미 38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9.15 인천상륙 직후 인천 진격을 위한 교두보 확보

  

하지만 연합군측도 여기에서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한다.
북한군처럼 3일간의 무행동은 아니었지만 38선 돌파를 두고 유엔군과 한국군 측의 이견이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한국군이 먼저 단독 돌파를 결정, 국군 제3사단의 38선 돌파를 필두로 북진에 나선다. 
      
1950년 10월 1일이다. (군에 다녀 온 남자라면 국군의 날이 창군일이 아닌 38선 돌파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서울 수복~ 북진 돌파까지의 이 3일 간 중국내부에서는 이미 전세를 파악하고 국경 코 앞까지 미군이 진격하는 것을 두려워 한 모택동이 참전을 염두해 두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라인 휴전선...

남북한 모두에게 3일이라는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휴전선이다.
61년 전에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서로의 리스크를 안고 우리들의 통일 의지와도 무관하게 외세에게 통일의 대가를 치러야하는 우습고 슬픈 현실에 처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야욕이 노골화 될 수록 통일이 가까와지는 것이란 말도 있다.

DMZ 155마일

 
6.25발발 61주년을 맞아 너무도 달라진 오늘날의 세태와 환경을 당시 냉전의 이념의 틀 안에서 대리전을 치렀던 약소국의 현실이 투영될리 없겠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백령도 포격사건을 상기하면서 엄연히 아직도 전쟁 중인 우리 현실에 대한 각성과 통일에 대한 필연적인 개연성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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