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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리뷰/라떼스토리 (추억과 에세이)

시내버스 안내양을 기억하시나요? 차장이라 불렸던 어린 소녀들..

by 라떼블루 2022. 11. 18.

1960년대 ~ 1980년대 후반까지 존재했던 시내버스 안내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나간 시절의 추억이기도 하고, 어려운 시절의 애환이 서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모두가 억척스러웠던 그때 그 시절의 버스 안내양

 

시내버스에도 안내양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아마도 7080 세대 분들은 여전히 시내버스 안내양을 기억하실 겁니다.

80년 대 초반까지도 버스 안내양이 있었으니까 8090 세대 중에서도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와~ 벌써 4,50년 전이라니..

 

아무튼 버스 안내양은 시내버스에서 버스 요금을 징수하고, 문을 닫고 열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여승무원들을 '차장'이라고 불렀죠.

이들이 승객들의 탑승 안전을 확인한 뒤 차체를 손으로 "탕탕" 치면서 "오라이~(아마도 영어 발음 all right을 의미한 듯)" 하는 신호를 해줘야 버스 기사가 출발을 했습니다.

 

버스 토큰이나 회수권이 나오고 나서는 조금 괜찮아졌지만, 그 이전에는 현금으로 버스요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안내양들이 일일이 현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승객들이 바삐 타고 내리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신공은 알려지지 않은 도시 전설이죠.

그때는 버스 앞쪽 내부에 엔진룸이 있어서 지금으로 치면 버스 뒷문이 유일한 출구로 문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안내양이 있었야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게 가능할 정도였으니까요. 

 

70년대-만원-시내버스의-출퇴근-장면
옛날,시내버스

 

지금 생각하면 복잡한 출근 시간 러시아워 때는 지금과 비교해도 정말 더욱 바쁘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도심권 지하철 망이 구축되기도 전에는 버스만이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이었기에 출퇴근 시간대의 만원 버스 지옥은 지금으로선 상상을 초월합니다.

안내양이 문을 다 닫지도 못 한 채 문 손잡이를 겨우 붙잡고 매달려 가는 아찔한 광경도 흔한 경우였거든요.

 

그런데 이처럼 고된 격무를 감당하던 당시의 버스 안내양의 평균 나잇대는 놀랍게도 18세 전 후였으며, 지금 고등학생 정도 나잇대의 안내양도 꽤 있었답니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중학교 정도만 졸업하고(당시 중학교는 의무교육 대상이 아니었음) 일을 찾아 일찍 서울로 상경한 어린 소녀들이 지인들의 소개 등을 통해 버스회사에 취직해 안내양이 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물게는 버스 안내양과 통학하는 여고생이 같은 또래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여고생들을 보면 당시의 안내양들은 정말 참 어린 나이의 여린 소녀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때의 10대, 20대와 현재의 같은 또래의 정신 연령이나 사회 분위기, 그리고 나잇대에 따른 지위 역할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만..

 

근면 성실의 상징이자 일선 대중교통의 지킴이였던 안내양

 

당시에는 지금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근면하고 성실했던 것 같습니다.

먹고살기도 쉽지 않았고, 직장 근무 환경 같은 것도 아주 열악했지만, 지금처럼 핵가족, 1인 가정도 아니고 집집마다 형제가 3 명 이상이 보통이었지만,, 그 대신에 비정규직 같은 것도 없어서 역설적으로 어쨌거나 가장 혹은 가족 중에 건강하고 근면 성실한 사람 하나만 있어도 온 식구가 먹고살 수 있었답니다.

  

물론 가족 중에는 한 사람 희생으로 무위도식하는 가족도 있어서 불우하고 열악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스토리가 영화나 드라마 스토리의 일반적인 모티브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유난히 울고 짜는 콘텐츠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은 웃겨야 하는데 당시에는 울려야 돈이 됐거든요.

감춰두었던 응어리진 마음, 즉 恨이 서린 신파가 유행하던 시기였죠. 

 

아무튼 당시의 버스 안내양들도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그처럼 어린 나이에도 가장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전쟁 같은 출퇴근을 하는 시간대에, 그리고 통금 해제 이후 급증한 취객과 진상들(그 당시도 정말 많았음)이 설쳐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대중교통의 안전과 편의를 지켰던 꿋꿋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버스 안내양은 고되고 힘들기도 했지만, 원한다고 아무나 되는 직업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신원이 확실해야 하고, 강인한 체력과 멘털도 중요하고, 근면 성실한 마인드는 물론 현금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에 정직함도 자격 요건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시내버스와 달리 고속버스 안내원은 고졸 이상의 고학력(당시)에 어려운 시험과 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만 했을 정도로  진입 장벽이 훨씬 어려운, 그래서 여성으로서는 꽤  인기 있는 직종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아는 사촌 형은 첫눈에 반한 고속버스 안내원에게 말 한마디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려고 틈만 나면 서울-광주행 고속버스를 자주 이용했습니다. (나중엔 그 승무원 해당 근무 차량 배차 시간도 알게 되더군요. 물론 한 때였지만) 

 

◎ 7080 상징의 하나, 버스 안내양이 사라진 이유

 

1967년부터 법령에 의해 신설되었던 여차장 안내양 제도는 1980년 고도 경제 성장 시기와 맞물려 서서히 쇠퇴하는 직종이 되었습니다.

도심 지하철이 개통되기 시작하고, 시내버스에도 안내방송과 알림 벨이 설치되었으며, 안내양이 아닌 기사가 직접 요금을 수거할 수 있도록 요금통과 카드 결제 시스템이 장착되기 시작하고,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 조 6항의 "대통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 운송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1984년 김포교통 130번 버스 소속의 38 명의 안내양들을 마지막으로 "차창"으로 불리던 시내버스 안내양들은 이내 '시대의 추억록'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는-추억이-된-시내버스-안내양의-뒷모습
시내버스안내양

 

그러나 그 당시를 함께 치열하게 살아온 수많은 우리 라떼들에게 시내버스 안내양은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는 정말 그랬지.."라는 멘트가 절로 나오게 하는 '세대 추억의 퍼즐'로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건 변변한 냉방시설도 없는 만원 버스,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 그리고 억척스러운 행동과 말속에 몰래 드러난 앳된 얼굴의 피곤에 지친 모습, 그러나 언제나 "오라이" 외치던 힘차고 당찬 목소리,,
그리고 앙증맞은 안내양 찐빵 모자..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이러한 회상의 조각들 역시..
이제는 '소중하고 애달픈 기억의 한 퍼즐'로 남아 '추억 속 세대의 공간'에 언젠가 다시 재생될 메모리 목록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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