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밤이 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일상 자체가 바쁘고 길어지다 보니 늦은 밤도 그냥 오후의 연장선에 있다는 느낌일 뿐,
환한 아파트의 보안등 때문에 불을 다 꺼도 그다지 캄캄한 줄은 모르겠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글 쓰고 이웃과 소통하는 재미에 잠자리 드는 시간도 늦고 그러다 잠시 눈 좀 붙였나 싶으면 먼동이 트고...
그러다 문득 베란다에서 회색빛 밤하늘을 보다가 어린 시절 고향의 산마을에서 보던 밤하늘 풍경이 떠올랐다.
한 여름이어도 시골의 밤은 길었다.
마을에 가로등이나 보안등도 없었으니 일찍 깜깜해졌다.
마을 어른들이나 형들은 잠자리 들기 전에 누가 뭐라할 것 없이 한 집에 모여들어 옥수수나 수수깡 같이 먹을 것(어른들은 막걸리에 어죽거리와 김치) 좀 가져와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외삼촌이 이장님이어서 동네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마루에 TV도 있었고 간첩신고용 자석식 전화기도 있는 집이었다), 그러면 외숙모는 어르신들이 낮에 천렵해 온 민물고기를 가마솥에다 넣고 국수도 넣고 고추장도 풀고 해서 어죽을 끓이신다.
볏단으로 아궁이를 때며 동네 아주머니들과는 조그조근 하게 수다를 떠신다.
볏짚 타는 냄새가 구수하다.
형들은 어른들 안 보이는 데서 서로 설레발을 치며 몰래 막걸리 전작을 하고,
나처럼 어린 또래들은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 해달라고 조르거나 부엌에 들어가 연신 가마솥을 열어 본다.
이 모든 것이 한가운데 멍석을 깔고 모기 때문에 마른 쑥을 태우며 그 불빛을 전등 삼아,
그리고 그 벌레 쫗는 마른 쑥 내를 향기 삼아 피어내는 한여름 마당 풍경이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멍석에 누워 본 밤하늘이었다.
정말이지 무수히 많은 별들이 눈 앞에 어지러이 흩뿌려져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 풍경이었다.
그 많은 별들이 수놓인 하늘에 한줄기 가로지른 마치 강물 같은 흰 빛의 띠가 보인다.
그러면 또 묻는다.
"형아! 저게 뭐여?"
" 응 저거? 저게 바로 미리내(은하수)여.."
늘 물어봐서 이미 아는 말이지만 '미리내'라는 말이 예뻐서 사촌형에게 한 번 더 묻는다.
그리고 나면 아늑한 기분에 빠져 누운 채 밤하늘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가끔씩 아이에게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자연과 추억,
그리고 그와 같은 아련한 향수를 알게 해주고 싶어도 어릴 적 기억의 그런 시골동네를 이젠 찾기 힘들다.
설령 찾아가더라도,
서울에서만 자란 아내는 자연 자체는 좋아하하지만 조금 오래 머물라치면 불편해하는 것이 좀 많고, 아이에게도 그다지 큰 감흥을 기대하긴 좀 어렵다 ^^
한여름 밤, 쑥향을 맡으며, 어른들의 걸걸한 얘기 소리와 도란도란 속닥거리는 동네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의 이야기 소리를 자장가 삼고 있노라면,
그 무수한 밤하늘의 별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내게 속삭여주듯 내 눈 앞에 다가와 어느덧 아늑한 꿈 속으로 젖어들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던 한여름의 밤풍경을 이제는 좀처럼 볼 수가 없는 것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아니, 어딘가에선 또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그리움은 일상의 동이 트면 또다시 까막히 잊힐 것임을 잘 안다.
어린 시절 이 세상 그 어느 것 보다도 더 크고 너그러웠던,
도무지 어떤 것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상상의 꾸러미를 안겨다 주었던,
그 한여름의 밤풍경을...
P.S.. 이 글은 이제는 종료된 다음 블로그에 올렸던 추억의 포스트입니다.
댓글